이방인 - 독서모임 후기
이방인 - 독서모임 후기
moseoh

이방인 - 독서모임 후기

moseoh · 2026년 08월 09일

지난번 《이방인》 후기를 이렇게 닫았습니다. 2주쯤 뒤면 다른 분들의 감상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다른 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다고요. 그 모임을 다녀왔습니다.

다들 비슷하게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처음 읽을 때는 감정이 결여된 사람 같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더라, 그저 심판을 받았을 뿐이더라 — 이런 얘기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제가 쓴 것과 같은 자리였어요.

표현 하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뫼르소는 감정을 점으로만 말하고 선으로 잇지 않는다는 말이었어요. 제가 “1차에서 멈추고 인과관계를 엮지 않는다”고 쓴 것과 같은 얘기인데, 점과 선이 훨씬 좋은 비유더라고요. ISTP 같다는 말도 나왔고, 솔직한 사람이라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졌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솔직히 여기서 끝날 뻔했어요. 그런데 발제 질문 하나에서 제 감상이 움직였습니다.

심판한 것은 살인인가, 다름인가

모임에서의 질문은 그거였는데, 듣고 나서 제 머리에 남은 건 다른 문장이었어요. ‘애초에 우리가 뫼르소를 심판할 수 있나?’ 그는 우리에게 심판할 기회를 주지 않았는데요.

제 감상은 세 번 움직인 셈입니다. 처음엔 뫼르소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구나, 그다음엔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랑 다를 게 없는데 사회적으로 심판당했구나, 이제는 그가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아서 우리에게 심판할 정보를 주지 않았구나. 그래서 우리는 살인 자체가 아니라 그의 다른 행동을 가지고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재판이 살인은 제쳐두고 계속 장례식 얘기만 한 것도 그래서였고요.

다만 여기서 하나가 걸립니다. “주지 않았다”는 건 그가 안 줬다는 뜻이잖아요. 줄 수 있었는데 안 준 거요. 그런데 저는 앞 글에서 그가 표현을 안 한 건지, 애초에 표현할 것 자체가 없던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썼거든요. 그래놓고 이번에는 제가 안 준 쪽으로 정해버린 겁니다. 결국 저도 그를 멋대로 해석한 사람 중 하나였어요.

이기심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저는 뫼르소가 어쩌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에게 해석의 비용을 떠넘겼으니까요. 마리가 그 비용을 치른 사람이죠. 사랑하냐는 질문에 그런 건 의미 없다고 답하고, 결혼도 네가 원하면 하자고 하고. 그러면 남은 사람이 알아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이기심이라는 말에 두 가지 뜻을 섞어 쓰고 있었더라고요.

하나는 방금 말한 겁니다. 표현하지 않아서 상대가 대신 해석하게 만드는 것. 이건 뫼르소도 저도 똑같이 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릅니다. 뫼르소는 그래도 이방인으로 살았어요. 사회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았고, 그 대가로 사형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광장에 증오의 함성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사회의 적대를 취소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것까지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는 이방인으로 살다가 이방인으로 죽었습니다.

저는 이방인처럼 행동하면서 사회적으로 대접받고 싶어했어요. 표현은 안 하면서 사람들이 제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 겁니다. 이쪽이 진짜 이기심이고, 이건 뫼르소가 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모임에서 제가 한 말은 반만 맞았어요. 이기적인 건 그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앞 글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나는 중간에 끼어 있고, 중간은 비용만 낸다고요. 진단까지였어요.

이번에는 한 발 더 나갔습니다.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 글에 제가 이렇게 썼거든요.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고. 그걸 알면서도 안 하고 있었던 거죠.

사실 이미 조금씩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전 회사에서 신입 직원들에게 건넨 안부 한마디를 다들 오래 기억해줬어요. 이 독서 모임도 그렇습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제 감상을 말하면서 저라는 사람을 알리고 있었던 셈이니까요. 이 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고 보면 저는 계속 뭔가를 찾아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죽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에도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 같다고 답했어요. 대학 때까지는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 오토바이를 한번 타보고 나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거든요. 수고했어요 한마디도 저한테는 같은 종류였습니다. 해보기 전에는 그게 그렇게 큰 건 줄 모르더라고요.

인생은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라고 말씀하신 분이 있었는데, 그 말이 계속 남습니다. 뫼르소가 끝까지 한 게 그거였고, 제가 못 한 것도 그거였어요.

선으로 다시 써본 뫼르소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라는 질문도 나왔습니다. 이 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하나는 확실합니다. 작가는 독자가 뫼르소를 심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표현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모임에서 해석이 그렇게 갈린 것 자체가 증거고요.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점이 아니라 선으로 쓴다면 어떨까. 한번 써봤어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나는 이 충격에 어제인지 오늘인지 구별이 안 간다. 엄마를 보내면서 슬픔과 삶에 대한 무기력함을 느낀다. 나 혼자 쓰기엔 넓어진 방을 보며 공허함마저 느낀다. 다음날 마리와 함께 희극을 보고 사랑을 나눴다. 어쩌면 공허함이 달래질까 싶었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나는 권총을 받아들었다. 마침 아랍인이 보인다. 장례식장에서 거슬리던 햇빛이 내 이마를 뜨겁게 달군다. 이 슬픔과 분노를 총에 담아 한 발 쏘았다. 아랍인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내 감정도 아직 몸부림치고 있다. 이내 나는 세 발을 더 쏘았다. 아랍인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바닷가의 고요한 파도 소리만 남았다. 비로소 내 마음도 고요함을 찾았다.

써놓고 보니 뫼르소가 이해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소설이 사라져요. 인과를 다 채워 넣으니 그냥 평범한 심신미약 살인자가 됐거든요. 심판할지 말지 고민할 것도 없고, 재판이 왜 장례식 얘기만 했는지도 의미를 잃습니다. 이해되는 순간 읽을 이유가 없어지는 거죠.

물론 이것도 제 상상입니다. 우리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